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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머 권리 장전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제프 앳우드가 쓴 <코딩호러의 이펙티브 프로그래밍>이라는 책인데, 제프 앳우드가 말하는 프로그래머 권리 장전이라는 내용이 눈길을 끌어서 이것을 올려본다.

나는 프로그래머들이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요구할 때 회사가 그러한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프로그래머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종의 프로그래머의 권리 장전을 제안하고자 한다.
1. 모든 프로그래머는 두 대의 모니터를 가져야 한다.
2. 모든 프로그래머는 빠른 PC를 가져야 한다.
3. 모든 프로그래머는 마우스와 키보드를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4. 모든 프로그래머는 편안한 의자를 가져야 한다.
5. 모든 프로그래머는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6. 모든 프로그래머는 조용한… 작업 환경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적은 몇 가지 기본적인 권리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특별히 과도한 요구도 아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수행하는 작업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기본적인 내용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근무하는 회사가 이 정도의 요구조차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회사가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는 데 따르는 비용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프로그래머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라! 그리고 기억하라.
당신이 회사를 바꾸거나(회사를 옮기거나) 아니면 회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꽤 구체적인 권리장전인데, 우리나라의 시스템으로 봤을 때 임금보장도 제대로 되어있지않는데 이러한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말처럼 이러한 것이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든다.

잡담

1. 한동안 블로그에 글을 쓰지 못했는데, 여러가지로 많이 바빴다는 핑계(?)도 있지만 예전처럼 생각없이 글을 쓰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인지 쉽게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가 힘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20살부터 블로그를 시작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는 진짜 말도 안되는 글들도 무끄러움 없이 쓴 것 같다. 가끔 예전 블로그를 들러 글을 읽어보곤 하는데, 얼굴이 화끈거려서 읽기 힘들었었다. 최근에 쓴 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글을 쓰고 따로 퇴고를 한다던지, 읽어보고 수정을 한다던지 하는 작업을 하는 편이 아니라서 정리된 글쓰기에는 꽤 자신이 없는데, 앞으로는 조금씩이라도 노력해서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만이라도 ‘잘’ 쓰도록 노력해야겠다.

2. 3학년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예전보다 전공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자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단지 시험을 위해서 공부한다는 것보다 공부한 내용을 활용할 수 있는 범위까지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 향후 개발자로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나로서는 필수적인 공부인 탓이다. 현재 공부하고 있는 운영체제나 알고리즘, 컴퓨터 구조같은 과목들은 내가 반드시 소화해내야 할 과목이기때문에 시험과는 별개로 정말 꾸준히 공부해야겠다. 중간고사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기말고사는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할 듯 하다.

3. 얼마전 인디고 서원에서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 강의’라는 타이틀의 참여형 강의를 들었는데, 평소 좋아하던 작가이자 블로거이어서 꽤 기대를 하고 참가했다. 블로그를 통해 그의 글을 꾸준히 접해오던 나인지라, 강의가 더 친숙하고 재미있게 들리기도 했는데 질의응답이 많은 강의 형태여서 더욱 유익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강의에서 좀 아쉬웠던 점은 그의 내공을 드러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 같고,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이 넓었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다음 번에도 꼭 부산에서 뵐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 (p117. 사회의 자기보호)

세 가지 상품 아닌 상품(노동력, 토지, 화폐)의 등장으로 발생한 위기는 ‘이중운동’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붕괴작용에 맞서 사회는 자기보호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토지와 노동을 상품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면 공동체는 붕괴한다. 이 때문에 공동체의 유지에 이해관계를 가졌던 세력들이 저항을 시작한다. 여기에 당연히 노동자들도 포함된다. 도피를 하거나 부랑자가 되는 등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저항도 나타나고, 나중에는 집단적인 형태의 노동운동도 나타나지만, 19세기 중요한 저항은 이러한 저항이 아니라 위로부터 나타난 저항이다. 사회의 자기보호가 지주들의 공동체주의로 나타난 바 있다. 지주들의 공동체주의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은데, 이는 1830년대 스핀햄랜드에서 시작되어 파시즘으로 이어진다. 이 공동체주의는 빈민들에 대한 온정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빈민을 공동체가 구제해야한다는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제를 하다보니 사회의 자기보호 논리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회를 보호하고 빈민구제를 위해서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했는데,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공동체 내에서 이 조치는 노동자의 존재조건을 훨씬 더 열악한 상태로 몰아갔다. 빈민에 의존하는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방출하기 시작하고 기아의 규율이 확산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스핀햄랜드법은 포기되고 신구빈법으로 넘어간다. 그것이 첫번째 사회의 자기보호와 실패 과정이다. 이런 사회의 자기보호 매커니즘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나온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때로는 굉장히 반동적인 형태로, 완전히 과거로 복귀하는 수구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대중을 상당히 많이 장악한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19세기 말 자본주의국가에서 개체화한 자유주의적, 정치적 주체형성의 결과, 더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화폐의 상품화에 따른 사회의 자기보호는 중앙은행의 제도화로 나타난다. 파국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데, 문제는 중앙은행의 개입이 그 사회를 더욱더 위기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목표는 안정적인 화폐질서 유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외 교역 시스템이 무너지면 안된다. 중앙은행의 목표 중 하나는 금본위제를 지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가면 금본위제와 자유무역을 동시에 지탱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국제간 교역에서 교란이 점점 커져서 자유무역을 지탱하다가는 자국화폐의 안정성이 무너지기 떄문이다. 그래서 자유무역을 유지하면 금본위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러면 경제도 붕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금본위제를 지키면서 자국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주의를 택하게 된다. 이것이 곧 1차대전을 촉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국가의 상업적 권역이 축소되면서 식민지 쟁탈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맞물려 있는 논리를 정리해보면, 자기조정적 시장경제가 금본위제를 요구하고, 거기서 나오는 화폐의 상품화는 사회의 자기보호, 즉 중앙은행의 개입을 촉진하며, 그 중앙은행의 개입은 결국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작동가능성을 붕괴시키면서 사회의 반동화나 자기보호를 다시 늘인다는 이야기로 간다.

객체의 생성과 소멸

생성자 대신 static 팩토리(factory) 메소드 사용을 고려하자. 클래스 사용자가 그 클래스의 인스턴스를 생성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public 생성자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외에 클래스에 public static 팩토리 메소드를 두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static 메소드로써, 그 클래스의 인스턴스 하나를 생성하여 반환한다.
static 팩토리 메소드의 장점은,
1) 생성자와 달리 자기 나름의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생성자에 전달되는 매게변수가 반환 객체를 잘 나타내지 못한다면, 이름을 잘 지은 static 팩토리 메소드가 더 사용하기 쉬우며, 이 메소드를 호출하는 클라이언트 코드도 이해하기 쉽다. 또 자바 클래스는 동일한 시그니처를 갖는 생성자를 하나만 가질 수 있기때문에 이러한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프로그래머들은 타입이 다른 매개변수의 순서만을 바꾸어 두 개의 생성자로 만든다. 그러나 이 방법은 좋지 않다. 그 클래스의 사용자는 자신이 필요한 생성자가 어떤 것인지 기억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실수로 다른 생성자를 호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생성자를 사용하는 코드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은 생성자가 정의된 클래스의 문서를 봐야만 그 코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static 팩토리 메소드는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으므로, 앞에 생성자와 같은 제약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의 클래스에 동일한 시그니처를 갖는 여러개의 생성자가 필요한 경우에는 생성자 대신 static 팩토리 메소드를 사용하되, 메소드 간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도록 신중하게 이름을 선정한다. 2) 생성자와 달리 호출될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객체를 생성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불변(immutable) 클래스의 경우 이미 생성된 인스턴스를 다시 사용할 수 있으며, 불필요하게 중복된 인스턴스들이 생성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미 생성된 인스턴스들을 저장했다가 반복 사용할 수 있다.
예를들어 Boolean.valueOf(boolean) 메소드에서는 인스턴스를 절대 생성하지 않는다. static 팩토리 메소드는 여러번 호출되더라도 이미 생성된 동일 객체를 반환할 수 있으므로, 클래스에서는 언제든지 인스턴스들의 존재를 직접 제어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을 하는 클래스를 인스턴스 제어(instance-controlled) 클래스라고 한다. 인스턴스 제어 클래스를 만드는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인스턴스를 제어하면 싱글톤 또는 인스턴스 생성불가 클래스로 만들 수 있다.
3) 자신의 클래스 인스턴스만 반환하는 생성자와 달리, static 팩토리 메소드는 자신이 반환하는 타입의 어떤 서브타입(subtype) 객체도 반환할 수 있다. 따라서 반환되는 객체의 클래스를 선택해야 할 때 뛰어난 유연성을 제공한다. 4) 매개변수화 타입의 인스턴스를 생성하는 코드를 간결하게 해준다. 매개변수화 클래스의 생성자를 호출할 때는 타입 매개변수를 지정해야 한다. 따라서 다음 예와 같이 타입 매개변수를 연달아 두번 주어야 한다.
Map<String, List<String>> m =new HashMap<String, List<String>>();
이런 식으로 중복 지정하면 타입 매개변수가 늘어나는 경우 타이핑할 분량이 많아지고 복잡해서 매우 힘들어진다. 그러나 static 팩토리를 사용하면 컴파일러가 타입 매개변수를 해결하도록 할 수 있다. 이것을 타입 추론이라고 한다. 예를들어, HashMap에서 다음 static 팩토리 메소드를 제공한다고 가정해보자.
publlic static <K,V>  HashMap<K,V> newInstance() {
return new HashMap<K,V>();
}

위에서 선언한 메소드를 다음과 같이 간결한 형태로 사용할 수 있다.
Map<String, List<String>> m = HashMap.newInstance();

단점은, 1) 인스턴스 생성을 위해 static 팩토리 메소드만 갖고 있으면서 public 이나 protected 생성자가 없는 클래스의 경우는 서브 클래스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public static 팩토리 메소드에서 반환하는 객체의 클래스가 public이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 다른 static 메소드와 쉽게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API문서에서 생성자는 별도로 표시되어 금방 알아볼 수 있지만, static 팩토리 메소드는 다른 메소드와 섞여있어 잘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생성자 대신 static 팩토리 메소드를 제공하는 클래스의 경우에는 인스턴스를 어떻게 생성하는지 알기 어려울 수 있다.

잡담

1. 변덕이 심한 탓인지, 몇개월만에 포스팅이다. 3개월 가량 블로그를 쉬었는데, 대선 정국에서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언급을 주로 하자니 블로그가 너무 난잡해질 것 같기도 하고, 나 스스로가 그다지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던 부분도 있겠다. 꾸준하게 써오던 책에 관한 글들도 개인적으로 하고 있던 독서를 거의 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을텐데, 올해부터는 독서와 전공공부, 영어공부까지 다 잘할 수 있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할 것은 많고 시간은 없다. 영화도 꾸준히 봐야하기도 하고..

2. 대선정국에 대해 몇마디 붙이자면, 다음 선거는 부디 ‘사람은 못될지언정, 괴물은 되지말자’라는 구호를 내세우지 않길 바란다. 이것은 민주당이 이야기만은 아닐텐데,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좌파세력 뼈저린 반성을 해야할 시기가 아닌가한다. 당대표 선거가 얼마 남지 않기도 한데, 한국의 좌파의 명맥을 잇고 있는 진보신당의 역할이 너무나도 필요한 시점이고, 그 필요와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만큼의 성장을 이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이번 선거는 너무나도 아쉬운 점이 많고, 가슴 아프다.

3. 독서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최근에 출간된 책들은 꽤 인상깊은 것들이 많아 행복한데, 슬라보예 지젝의 방한 기록이 담긴 <임박한 파국>과 <멈춰라, 생각하라>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꾸준히 책이 출간되고 있지만, 정치전반에 대한 비평이 주를 이루고 있어 꽤 흥미를 끄는 부분이기도 한데, 특히 <임박한 파국>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과 함께 지젝을 읽기 위한 입문서로서 활용한다면 나쁘지않을 책이다. 또 아직까지 읽지 않고 있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는 기대되는 책이다. <트랜스크리틱>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라, 아직까지 읽는 것을 보류하고 있지만 조만간에 꼭 읽어봐야 할 책인 듯하다. 이것말고도 테리 이글턴의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 강의>가 꽤 인상깊은 책이다. 이것말고도 다른 책들도 많이 봤지만 주로 시기가 시기인만큼 맑스주의에 관한 책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 같다. 덧붙혀 <자본주의 역사 강의>도 조만간에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영화 <루퍼>를 보고

영화 <루퍼>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않고 봤지만, 내 예상보다 굉장히 탁월했다고 꼽는다. 꽤 어렵다는 평들도 많지만, 헐리우드에서 시도할 수 있는 작업들로 꽤 참신한 아이템을 다뤘다고 본다. 그중에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크게 몇가지에 대해 언급해봤으면 한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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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꽤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인 <라디오 스타>에 슈퍼주니어가 출연했었다. 그들이 교통사고로 죽을뻔헀었던 일들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음에도, 그 당시에 옆에 있었던 기자들은 그들을 구조하기위해 119에 전화하는 대처조차 하지 않았고, 카메라를 들고 죽어가는 그들을 찍어대기 바빴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생명은 단지 돈벌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할 기자라는 신분에도 이렇듯, 윤리적 주체가 되는 것은 요원하다. 이뿐인가. 영화 <피에타>에도 그러하다. 돈이 없어 돈을 빌리고, 돈이 없어 불구가 되고, 돈이 없어 자살을 하고, 다시 복수를 부르고… 감독인 김기덕은 이야기한다. “세상의 범죄의 80%는 돈으로 인해 일어난다.” 영화에서도 조민수는 이야기한다. “모든 것은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난다.”그렇다. 돈이 문제다. 그 끝은 장미빛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돈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순수하다. 파국은 예상된 것임에도, 그것의 대상이 ‘나’가 아니길 빌며, 더욱 보수적이게 살아간다. 그러한 것의 반복은 결국 절망을 낳는다.

체첸을 생각한다. 체첸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 기간동안 러시아에 항거해온 민족이다. 제정 러시아가 체첸을 굴복시킨 후, 50년간이나 러시아와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러시아가 체첸의 독립을 허용할 경우,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요구가 거세어 질 것은 자명한 일이기에, 러시아는 체첸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2차 체첸전쟁을 러시아가 승리로 이끌었으나, 아직 체첸과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는 체첸의 테러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러시아의 보복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평화란 가능한 것인가? 그 주체가 국가가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푸틴은 체첸전쟁을 정치적 쟁점으로 끌고 와, 강경 일변도의 군사작전을 전개했고 그것으로 인해 그의 정치 기반은 강화되었고 그의 지지도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911테러로 인해 가장 큰 수혜자는 미국이 아닐까.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시는 그로 인해 높은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하고, 이라크 전쟁을 통해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박노자가 말하듯, “전쟁이 가져다 주는 특수(산업호경기)가 없으면 자본주의 경제는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되며 장기적으로 지탱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주기적 불경기로 소비재 시장이 위축될 때 적당한 투자처가 없는 엄청난 잉여 자본을 가격이 안정적인 무기 생산에 쏟아 부어 불황을 유보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운영 기법이다”라는 것은 단지 음모론이라기 보다는 힘들다.  경기가 침체되면 무기 생산 경제를 통해 회복시키는데, 그 무기의 생산을 촉발시키는데 필요한 것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세계평화를 위해 미국이 존재한다”는 논리는 허구로 볼 수 밖에 없다.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교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선에 대한 다수의 인식이다. 그러한, 공동선을 향한 인식의 전환을 꿈꾸기에는 우리 사회가 너무도 우경화된 경향이 있다. 외부로는 일본이나 중국의 도발, 내부로는   정치적, 군사적 ‘안보’를 강화함으로서, 시민들의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중국도 계속된 군사력 증강을 추진하고 있고, 러시아 푸틴 대통령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계속된 분쟁속에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다수의 인식을 공동선에 향하게 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아이패드로 도서관에서 책 대출하기

생활에 도움되는 글을 올리는 것은 처음인지라 어색하군요. 하지만 제가 가장 유용하게 쓰고 있는 방법인지라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우선 지역도서관에 회원가입이 되어있는 분들은 지역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셔도 되구요. 대학생이라면 자신의 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저는 지역도서관을 예로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이와같이 지역도서관 전자도서관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로그인을 해야됩니다. 로그인 전 지역도서관 통합아이디가 있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인증절차 후 바로 로그인이 가능하구요. 그렇지 않다면 지역도서관에 문의해서 자신의 아이디를 통합계정으로 바꾸는 절차후에 인증을 시도해야할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단순합니다.

다음과 같이 기기의 인증을 하셔야되는데, 아이패드나 아이폰같은 iOS운영체제의 기기들과 안드로이드 기기의 인증 방식은 다르기때문에 자세히 읽어보시고 인증받으시면 됩니다. 절차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기때문에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하면, PC에서 책을 바로 읽을 것인지, 대출할 것인지가 나오는데요. 그 옆에 보면 <교보>라고 되어있는데, 이 책은 교보문고에서 제공하는 책이기때문에, 교보문고 도서관 어플리케이션을 스마트폰/태블릿에 설치하면 기기를 통해 책읽기를 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만일 <교보>가 아닌, <BOOKCUBE>라고 되어있다면, 북큐브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하면 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웹을 통해 대출하지 않더라도 해당 어플리케이션(교보,북큐브 등)에 들어가면 거기서 바로 대출하여 책 읽는 것이 가능하니 편한 방법대로 대출하면 됩니다. 지역도서관의 전자도서관 페이지에서 대출하는 방법 외에도, 대학 도서관에 접속하여 대출하는 방법도 있기때문에, 궁금하시다면 해당 도서관에 문의하시면 쉽고 빠르게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대출할 수 있는 도서관을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어플리케이션을 접속하여 도서관 목록을 보고 기기를 등록하시면 보다 쉽고 빠르게 할 수 있습니다. 아래와 같이 등록할 수 있는 도서관이 많이 있으니, 자신에게 해당하는 도서관을 모두 등록하신다면 대출 할 수 있는 책의 종류가 많이 늘어날 수 있곘죠.

국가란 무엇인가?

대선을 앞둔 현재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며 대통령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닐까. 그런 부분에 있어, 유시민의 저서 <국가란 무엇인가>는 가장 중요한 부분중 하나인 국가관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저자인 유시민은 자신을 ‘진보적 자유주의자’로 규정하고 있기때문에, 그러한 자신의 국가관에 대한 변론도 꽤 흥미있기도 했고 그러한 결과로 도출되는 과정- 수천년동안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국가관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에 대한 과정을 쉽게 그렸는데 본인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을 담은 글쓰기를 통해 나온 책이어서 그런지 독자들이 읽기쉽게끔 써져있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책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면, 크게 4가지 국가관- 즉, 홉스의 이상국가인 전체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국가주의 국가관 (이념형 보수, 국가주의) 애덤스미스, 루소, 밀, 소로 등 여러 철학자들이 이상국가로 생각해온, 국가란 공공재 공급자에 지나지 않으며,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선 안되는 것을 강조한, 자유주의 국가관 (시장형 보수, 자유주의) ,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여겼던 맑스의 공산주의 국가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목적론적 국가관을 예로 들었다.

이러한 국가관의 나눔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국가’라는 것이 유시민이 말하듯,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모든 논의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맑스를 비롯해서 많은 사회주의 학자들, 아나키스트들이 ‘국가’는 선한 대상이 아니라,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고 여겼던  것을 비교하자면 그 간극은 너무도 깊다. 그렇기에 책에서의 김상봉 교수의 말처럼, 결국은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일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사유는 자유주의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박노자가 예견했듯, 국민참여당과 민노당의 한집살이는 필연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 책과는 다른, 박노자의 생각을 담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박노자의 국가론이 삐딱하게 보이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개념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괴리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할텐데, 이 책의 서문에서 김동춘 교수가 말하듯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가 불편함을 주는 까닭은 이책에 담겨 있는 내용 때문이라기보다, “국가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중적 모습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의 폭력성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국가의 기능에 기대를 걸고 있는 모순에 대해서 박노자는 사정없이 폭로해버린다는 것이다. 국가란 태생적으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 밖에 없기때문에, 국가를 합리적인 조절자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단언한다. 그의 말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냥꾼에게 불살삼계를 설법하는 일과 다를 게 없다.”며 피를 먹고 자라온 자본주의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는 대공황 때 23%에 달했던 미국의 실업률이 전쟁 특수와 대량 징병을 통해 1%로 떨어지고, 워싱턴 근로자들의 실질소득도 전쟁 호경기로 인해 42%나 늘어났다는 통계를 증거로 내놓기도 한다.

 

과연 어떤 국가론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내가 섯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현 정부에서 해온 폭력을 놓고만 본다고 한다면 그러한 폭력에 대한 비판은 모두가 같으리라 생각한다. 박노자의 비판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할 수 밖에 없다는 결과를 도출 할 수 밖에 없다”에서 그치는 반면, 유시민의 개량주의는 “정치를 통해 최악을 면하고 그보다는 나은 선을 추구하여 국가를 선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어야한다.”라고 말하고 있어,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이나 변화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더 매혹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유시민이 말처럼 그것이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지젝의 말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환경이 오염되더라도, 어린이들이 죽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윤리의 부재가 지속될 수 밖에 체제다’고 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과연 무엇이 옳은가. 그러한 논의에 대한 해답은 끝이 없겠지만 유시민이 말처럼, “ 마르크스 주의자는 선거(정치)를 통해 정부를 교체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적다”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뼈아프게 통감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선거는 어차피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 다툼이며, 민주주의 정치는 사회혁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오도하는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바꿔놓은 것이 없기때문에 대중들은 더욱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는 정치인이라면, 정당인이라면 어떤 행위가 진정 사회를 위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당의 내부인이 불합리하게 국회의원자리를 내려놓는 것을 막기위해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모두 버려가면서까지 자신들의 내부권력을 유지하고자하는 것이 ‘진보’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정치와 권력이 분리된 전지구적 ‘공백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며, 이 정치와 권력이 다시 만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인류가 마주한 최대의 과제”라고 말한다. 그에 있어 우리는 어떤 것에 희망을 가져야하는가. 국민 개개인이 가진 표를 활용하여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이에게 주어져야하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하는가. 그러한 논의는 끝이 없이 계속되어야하며 국민 개개인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전태일을 다시 읽다

1970년 11월 13일, 23살 나이에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를 불태워 죽은,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한 노동자의 죽음은 전혀 중요한 사건이 되지 못했지만, 그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고, 평생을 주린 창자가 차토도록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드물었으며, 죽을 때까지도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았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존경받아보지 못하고 이름 없이 살아왔지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죽어간 그의 죽음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은 오늘 지금까지도 유효할 것이다.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아보지 못했기때문에 그 시대의 노동환경이 어땠는지 짐작하기는 힘들겠지만,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지 않나 한다. 엄연히 근로기준법이라는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평등해야할 인권,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환경에 있던 피복재단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것 같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노동환경이 나아진 것에는 그의 투쟁과, 그의 숭고한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러한 환경에 살고 있을 수 있었을까. 자본가들은 더욱 착취하고, 노동자들은 더욱 착취당하는- 기본적 윤리가 부재한 세상에 살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안타까운 생각이 앞서기도 한다. 박정희라는 우상화된 망령이 대한민국을 아직까지도 뒤흔들고 있음에도, 우리는 올바르게 전태일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고 있을까. 2008년 2월 지엠대우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명박 당선인은 비정규직의 절규를 들어라’며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고, 그해 여름 KTX와 새마을호 승무원들은 서울역 40m 조명철팝에 매달렸다. 뿐만아니라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8년 공장 옥상에 올라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94일이라는 사상 최장기간의 단식농성을 벌였다. 2009년 1월, 망루위에서 ‘살려달라’고 절규하던 용산 철거민들은 용산참사 이후로, 아직까지도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뿐인가, 2010년 여름에 시작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포크레인 점거농성, 기아차 모닝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숙투쟁, 공장 정문 아치에 올라 영하 30도 동상 걸린 발로 64일 고공농성을 벌인 지엠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투쟁하며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화’를 요구했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송전탑에서 88일동안 싸운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 대학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투쟁들, 수백명의 사람들이 옥살이를 하며 투쟁했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22명이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이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힘없는 자들, 자본의 탐욕과 정리해고의 부당함에 의해 배제된 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너무도 많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들은 너무나도 차갑다.

-때문에, 우리가 읽은 이 책 <전태일 평전>의 뒷장의 신영복 교수의 말했듯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을 필요가 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속에 점철되어 있는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한다. 이 평전의 필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삶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전태일을 우리들의 가슴속으로 옮겨와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을 밝은 얼굴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